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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연구(19)-이권희(총회신학 학술원 교수) 2021-10-13 오후 2:00:00 | 관리자 | 2022-0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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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교회는 일곱 편의 참회시(penitentialpsarms)를 지정하여 사용하였다. 이 일곱 편의 참회시는 6, 32, 38, 51, 102, 130, 143편이다. 즉 이 시들은 시편의 시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고백하는 시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참회시들 가운데 이번 지면에서 연구하게 될 6편에는 죄에 대한 직접적인 참회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통에 의해 참회시로 불리운 것은 시편을 비롯한 구약에서의 죄의 관념에 대해 오늘날의 신학이 다시 한 번 고찰할 부분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6편 연구에 앞서 구약의 죄의 개념에 관하여 잠깐 고찰해 보려 한다. 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의 죄의 관념들을 단어를 중심으로 하여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단어는 ‘하타아’ 또는 ‘하타트’이다. 이 단어는 주로 과녁을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빗나간 행위(삿 20:16)를 의미한다. 두 번째 단어는 ‘아본’이나 ‘샤가’로서 이 단어들은 바른 상태가 아니라 변형되고 왜곡된 상태를 의미한다. 세 번째 단어는 ‘’라샤‘ 또는 ’아샴‘인데 이는 범죄로 인하여 행위자의 신분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네 번째 단어 ’페샤‘는 상호 합의 사항에 대한 불이행, 또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의미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6편에는 교회가 참회시들로 지정하여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에 열거한 단어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시편 6편을 시인이 질병에 시달리며 부른 노래로 정의하여 개인 탄식시로 장르를 구분하는데, 이렇게 구분될 수 있는 이유는 탄식에 참회가 포함되기 때문이다.6편에 죄와 관련한 단어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다윗이 묘사하는 고통의 상황은 죄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라는 외침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노하셨음을 상정하는데 이는 죄와 관련된 단어들이 나타나는 참회시 38편의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38:1)와 거의 똑같다. 즉 다윗이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의 배경에는 죄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징계를 멈추어 달라고 두 번이나 간구하는 것으로 시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원인은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만 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라는 두 번에 걸친 호소함의 배경이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죄에 대한 무게가 크다는 것을 암시할 뿐이다. 여기서 참고적으로 죄와 징벌, 죄와 고통에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쟁점이 있음을 잠깐 짚어보고자 한다. 이 쟁점은 누군가에게 닥친 고통이 6편에서 다윗이 호소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죄악의 결과로 주어진 징벌로 추론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즉 죄와 징벌, 고통과 죄라는 도식이 성립하는가의 문제이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 고백은 인간의 고통이 죄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죄와 징벌의 문제는 결코 도식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우리는 욥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통이 그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세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원리를 하나님의 섭리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확히 아는 것처럼 욥의 고통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고통, 죄와 징벌이 관계가 있으나 그것이 도식적 관계로 명확히 성립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6편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6편에는 다윗의 육체적 고통과 회개가 연결되어 나타나지만 이를 여호와의 사랑과 연결 짓는다는 특징이 있다. 6편 1절의 “나를 징계하지”로 번역된 “테얏쎄레니”의 원형 ‘야싸르’는 교육적 상황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서 교훈하고 징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야싸르’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그들에게 가하는 사랑의 매를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이다(레 26:28). 따라서 다윗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어 징계를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셨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학자들은 이 죄악이 아마도 유부녀였던 밧세바를 취한 일과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사건으로 추정한다. 물론 다윗의 마음에 고통을 가져다준 일차적 원인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의 비방이 8절과 10절에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밧세바 간음사건이 있은 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나서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편 6편의 진정한 가치는 다윗의 간구가 단지 절망 가운데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오히려 결국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셔서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여 물러가고 다윗의 최후 승리로 인해 그의 원수들이 심히 떨 것이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시를 맺고 있는데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8-10절). 다윗은 6편의 간구를 통해 실존적인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인하여 오는 고통을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통해 해결한 것이다. 그의 부르짖음은 응답되었으며(8-10절), 그 응답의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4절). 이 시는 병석에 누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개인적인 기도이다. 초대교회 이후 줄곧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 전통에서는 제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시편 6편을 회개시로 낭독하였다. 이 시를 낭독한 이유는 육체적으로 병약하고 영적으로 피폐한 위기 속에 처해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는 취지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죄의 고백을 통하여 용서받고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모든 육체적 고통과 영적 고통이 물러가고 형통한 삶이 보장됨을 낭독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영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전 인류의 죄와 교회와 성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이러한 고통이 죄로 인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시편 6편을 노래한 다윗이 찾은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새로운 회복을 위한 기회일 수도 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분명히 회복시켜 주시고 승리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기도하며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길을 걸어감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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