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설교는 어떻게 디자인할까 | 관리자 | 2022-0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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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자인을 어떻게 할까(10)…인간정황에서 묻고 성서에서 해답 옛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곽안련 선교사갭신학지남」(1918~1940)과 그의 저서「설교학」등에서 제목설교에 관련된 글 발표에는 제목설교라고 했고, 오늘날에는 좀더 "인간상황"을 더 강조해서 "상황설교"라고 부르기도 한다(박근원 박사의 저서 「오늘의 설교론」에서는 이 양자를 다르게 본다. 강의자가 제목설교라 함은 인간상황에 근거해서 도출한 제목일진데 반드시 성서 본문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으려고 할 때, 제목설교와 상황설교를 거의(다른 면은 뒤에서 다루겠다.) 같은 의미로 쓰기로 한다. <뉴스앤조이>, 강의자의 "다른 기사 보기"의 2004. 12. 1. 자의 "외로움과 홀로움"이 그 예이며, 또한 "제목설교는 어떻게 디자인 할까"의 범예(範例)로 하겠다. 1. 제9강의에서 제목에 대한 것을 뒤로 미루자고 했는데 이왕 "제목설교"에 대한 논제라면 먼저 "제목"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하고 싶다. 이전 강의에서 제목은 문패와 간판과 같다고 한바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설교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성명"과 같다. 사람에게서 성명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해주듯이, 설교에서 설교제목이 회중(會衆)에 회자 되어 평가를 받게 된다. 제목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명사형 2)문장형이 그것이다. 명사형은 "사람을 보는 시각", "님이 떠난 빈자리와 같은 한국교회", "느보산의 모세", "우연한 화살" 등이다. 명사 앞에 형용사나 형용적인 수식어가 있는 것이다. 문장형은 "갈릴리에서 만나자",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강요된 사랑은 사랑의 모독입니다" 등으로 한 문장으로 주어(어떨 때는 함축되어 있지만 주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와 술어가 있는 명제적인 것을 말한다. 제목의 내용적인 면에서 분류를 한다면, 1)은유적 제목(설교내용을 압축해서 제시하는 것) "목자와 양" 같은 것이다. 2)상징적 제목(설교의 대상을 가리킨다) "미디안 광야의 모세" 3) 역설적 제목[역설(paradox)역설을 통해서 설교를 심화시키는 것) "가난한 자의 행복"(산상보훈의 8복이 다 역설적인 것이다.), 4)기원적 제목(소망과 염원을 제시하는 것)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5)형상적 제목(친근감 있는 소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들의 백합화", "숨겨진 진주", "옥합을 깨트리는 여인", 6)조어적(造語的) 제목(단어와 단어를 결합하여 새의미를 만드는 조어법이다)- "세미한 소리", "급하고 강한 성령의 바람", "성령의 바람부는 날의 은혜" 등이다. 7)복합명사적 제목(단순하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하여 복합명사를 쓰는 것)-"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목사님, 목사님, 당회장 목사님", "민들레, 민들레교회 이야기", "베드로여, 베드로여",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복합적이면서 본문내용상 역설적 표현) 등이다. 한 설교자의 목회적 과정과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사를 압축시킨다는 의미에서 설교제목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대략 설교제목만 보아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설교제목을 어떤 것으로 할까를 생각할 때 이런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어감(語感)이다(설교 본론에서도 그렇지 마는). 어감이란 무엇인가. 언어의 생명력이다. 어감 없이는 모든 말이 개념으로 취급된다. 개념적인 것은 너무 딱딱하고 읽기도 골치 아프다. 다시 말해서 설교제목이나 본론의 말이 어감 없는 말은 언어의 시체와 같다. 어감은 언어생활에서 생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주로 "설교마당"에 올려지는 설교 대부분이 어감이 없이 맹송맹송한 감이 난다. 한 사상을 전달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잘 전달하는 힘(능력·은혜)이 있어야 한다. 언어활동은 정서를 이입(移入)함으로써 표출자의 표현효과를 훨씬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강의자의 "다른 기사 보기" 참조) 강의자가 설교에 자주 적합한 시를 인용하는데 "댓글"로 다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의 능력으로 하면 되지, 무슨 시(詩) 나부랭이냐고 말하는 것을 더러 보았다. 설교도 말씀의 전달로써 일종의 예술이다. 시를 모르고 어찌 인간상황을 논할 것이며 "시편"을 어찌 읽고 알 것인가! "시인은 단 한 줄의 시를 읊조리기 위해 많은 도시를 거닐어야 하고, 죽은 사람과 하루 밤을 지새워 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강의자의 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나온 글).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고뇌를 모르고서는 좋은 설교를 전달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시는 인생 고뇌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뇌를 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갗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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